본문 바로가기

여행/아프리카 - 모로코

모로코 - 아틀라스 산골마을 / 새 집 두고 헌 집에 사는 사람들

2017년 4월

우리가 묵은 새집의 응접실

아틀라스산맥에 깃든 또다른 골짜기 마을 이리란의 모습이다. 계곡 상류의 깎아지른 절벽에 형성된 이 마을은 집들은 물론이고 테라스 밭들 역시 절벽에 기댄 형국이라 보통 두어 평, 넓어야 대여섯 평짜리 밭들이다.

우리가 묵고 있는 집의 호스트 가족은 폼나는 새 집을 잘 지어놓고는 아직도 이사를 하지 않고 헌 집에 살고 있어서 우리는 잠은 새 집에서 자고 밥은 헌 집으로 먹으러 다녔는데 우리 눈엔 헌 집이 더 아늑하고 좋아보였다.

아직 이사를 하지 않은 이유는 부엌 때문인데 현대식 부엌에선 나무를 때지 못하니 가스를 사다 써야하고 장작화덕에 굽던 빵도 가스오븐을 장만해야 구울 수 있는데 아직 그 모든 걸 감당할 만한 여유는 안되니 헌 집에 그냥 살고 있는 것이다.

헌 집의 재래식 부엌


아버지가 안 계시는 이 집 맏아들은 부인과 아이들을 고향집에 맡겨두고 마라케시에 돈 벌러 나가 있고 둘째 아들 하미드가 농사일과 가축 돌보는 일을 도맡으면서 동네의 유일한 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 눈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미드는 겨우 열아홉 살인데 어머니와 형수, 여동생 둘과 조카 셋까지 보살피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고 있다. 그는 야무지면서도 배려할 줄 알고 순수함도 간직한 귀여운 청년이다.

우리는 아침을 먹고나서 하미드가 밭에 물 대러 간다기에 따라 나섰는데 거의 암벽등반 수준의 경사를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는 중간중간엔 소먹일 풀을 해서 지고 가는 아낙네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산더미같은 풀짐을 지고도 가파른 산길을 잘도 걷는다.

농촌출신이지만 농사 안 짓는 집에서 자란 최선생은 민요를 통해서나 민속기행 방송하느라 시골 노인네들에게 말로만 듣고 머리로만 알던 실제 농삿일을 먼 이국 땅 산골에서야 두 눈으로 확인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이들의 삶은 세제와 플라스틱 제품을 좀 쓰는 점만 빼면 비료도 농약도 안 쓰니 거의 순환이 되고 식량도 넉넉하진 않아도 자급자족은 될 듯한데 전기와 가스와 전자제품을 구매해야 하고 자녀들을 도시로 유학시켜야 하니 남자들은 대도시로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수려한 경관에 인공소음 하나 없는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 향기로운 풀을 뜯어먹고 자라는 건강한 가축들, 그들이 생산하는 고기와 우유와 계란과 버터, 직접 농사지은 밀로 만든 장작오븐 수제 빵...

한국에선 더이상 이런 식재료를 구할 수도 없을테지만 이와 유사한 환경에서 생산되는 재료들로 식단을 짠다면 보통의 도시민 가정의 식료품 지출비보다 서너 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좋은 경치와 맑은 공기를 찾아 주말마다 도로를 가득 메우는 차량행렬의 비용을 생각한다면 그 비용은 더 높아질 것이다.

문명이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또는 경제적이라는 미명하에 스스로 갖다버린 것들을 다시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연 옳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헌 집의 부엌 바닥에 차려진 어느 날의 아침상, 대추야자와 양념을 제외하면 계란과 버터 올리브유는 자가 생산한 것들이다.